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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에서의 요하네스 베르메르>

1. 빛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였던 17세기 대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632년 10월 31일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마을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52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직업을 계승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은 가정의 실내 정경을 주제로 한 풍속화가 대부분입니다. 그의 고향인 '델프트'도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합니다. 1653년, 그는 델프트의 성 루가 길드라는 화가 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합니다.그러나 델프트에서 마을 여인숙의 주인이자 미술상으로 일했던 그는 가족의 생계도 같이 책임졌으므로 많은 그림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베르메르가 처음 작업한 것은 종교화였습니다. <마리아와 몰타의 집 그리스도>는 플랑드르에서 선호하는 주제였습니다. 베르메르는 빛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기에 베르메르는 다양한 화가의 작풍을 참고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찾고자 하였는데 주로 빨강, 파랑, 노란색의 삼원색과 흰색을 사용하였습니다. 델프트에 오랜 기간 있었던 베르메르는 이 작은 마을에서 화가로 대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1656년, 베르메르는 풍속 화가로 전향합니다.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자> 작품을 보면 섬세한 질감 묘사와 반사광, 균형감을 볼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는 삼원색과 그 유사 색, 녹색과 흰색 등으로 색의 수를 한정해 보색 효과를 이용하여 인물 등이 명확하게 돋보이도록 묘사하였습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0년대, 베르메르가 자신의 화풍을 확립시키던 시기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 시장을 통해 구매자를 찾았는데 베르메르는 다른 화가와 차별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부드러운 빛에 휩싸인 공간에서 여성이 가사를 하는 등 한눈에 보아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페르메르가 그린 트로니 (당시 많은 작가들이 인물의 특징과 골상을 훈련하기 위해 제작한 초상화)가 2점이 있는데 이 중 1점은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입니다. 작품 속 소녀가 방금 이쪽을 돌아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어둡게 그려진 배경과 한정된 색 수로 인물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이 소녀는 상상 속에 존재할 것 같은 신기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1675년, 베르메르는 아내 카탈리나의 집에서 숨을 거둡니다. 베르메르가 죽은 지 5개월 후, 그녀는 1672년 프랑스 침공 이후 베르메르가 거의 무수입이 되어 버린 것으로 파산을 신청합니다. 이를 통해 카탈리나는 재산을 채권자로부터 지킵니다. 카탈리나는 10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카탈리나가 죽은 후, 재산은 아이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카탈리나 어머니의 재산은 상당했습니다. 르메르가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친모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1866년 프랑스 비평가 트레뷔르거가 베르메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베르메르의 이름이 전 세계 널리 퍼지게 됩니다. 

 

3. 네덜란드 바로크 시대

1600년대 초, 네덜란드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역 독점, 상업 활동, 기술 발전으로 높은 임금이 보장되었고 국민들의 소비는 커졌습니다. 그만큼 풍족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네덜란드를 덮쳤으며 많은 주민들이 죽었습니다. 흑사병이 수 많은 노동력을 앗아갔고 이 자리는 이민자들로 채워졌습니다. 무역과 상업으로 성공한 계급들이 별장과 성을 사기 시작했으며 미술 작품으로 집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초상화 의뢰가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초상화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17세기에 초상화를 거실, 복도 등에 걸어두었기 때문에 가슴 위로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러한 초상화를 트로니라고 부르며 이는 네덜란드 바로크 시대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이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벨기에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벨기에에 소개, 네덜란드의 프란스 할스가 네덜란드에 도입시켜 이후 렘브란트,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이르러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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