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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1. 스페인의 대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지역의 펜테토도스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도금공이었으며 어머니는 몰락 귀족의 딸인 그라시아 루시엔테스였습니다. 고야는 여섯 자녀 가운데 4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아는 수도회 부속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1759년 13세였던 그는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로코코 양식을 나폴리에서 사라고사에 도입한 아라곤 대표 화가입니다. 사제 관계는 4년간 계속되었으며 고야는 판화 모사, 석고 데생, 그림, 인체 소묘, 유채 기법까지 습득합니다. 1765년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고야는 당대의 유명한 궁정 화가인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불화로 인해 졸업을 인정받지 못하고 왕립 미술 학회에 입회신청서를 제출하나 모두 거절당합니다. 1771년, 고야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로마나 나폴리의 고대 조각이나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미술을 배웁니다. 그는 파르마의 회화전에서 2등을 수상합니다. 사라고사로 돌아온 그는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의 화가가 됩니다. 1773년, 그는 공방에서 만난 사라고사 출신의 젊은 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에우의 여동생 호 세파와 결혼합니다. 그 후,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인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아과 엘 파르도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기를 이용해 씨실과 날실을 엮어 만든 직물 작품) 제작에 참여합니다. 태피스트리는 궁궐이나 귀족의 집의 거실에 장식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작업은 왕의 눈에 들었으며 이후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며 왕실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됩니다. 이후, 당시의 재상인  플로리다블랑카 백작과 당시의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돈 루이스 친왕 등 궁궐의 중요한 인물로부터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습니다. 그는 꾸준히 궁정 내에서 인맥을 펼쳐갔으며 의뢰받은 초상화에는 고야의 자화상이 자주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를로세 4세의 가족>

2. 카를로세 4세의 가족

1780년대 중반 고야는 40세의 나이로 출세하게 됩니다. 인기 화가가 된 고야는 1789년 궁정 화가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새로운 국왕 카를로스 4세에 의해 궁정 화가로 취임된 그는 왕 부부의 초상화, 궁정 내의 태피스트리 제작으로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그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고야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기존의 보수적, 봉건적인 테마가 아닌 보다 자유롭고 인간다운 주제를 모색하게 됩니다. 또한 과거에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화법, 속박받았던 독창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1792년, 고야는 콜레라로 인해 청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 후, 복귀한 그는 구 체제의 스페인 정부로부터 사회적, 경제적 속박에 시달리는 시민의 모습을 그림으로 어둡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1800년에는 궁정 화가로서의 최고의 걸작인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작품을 그립니다. 그는 궁정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소묘나 판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작품에는 남녀의 사랑, 종교 행사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으며 일관되게 비판, 풍자적인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작품으로는 <벌거벗은 마하>, <옷을 입 마하> 가 있습니다. 

 

3. 검은 그림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는 반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고야는 반도 전쟁에 관한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유명합니다. 마드리드 시민이 프랑스군에게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병사는 어둠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며 시민은 빛 속에서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합니다. 하지만 그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의 가정부와 그녀의 사생아와 함께 살았습니다. 고야는 그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세상과 떨어져 지내면서 <검은 그림>들을 제작했습니다. 검은 그림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고통 속에서 그가 집 벽에 직접 그린 14점의 그림을 의미합니다. 전쟁, 혁명, 종교 탄압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인간의 마음속 증오심, 어리석음을 공포스럽게 검은색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이 후 프랑스로 이주했다가 스페인으로 돌아오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프랑스 보르도로 돌아갔으며 182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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