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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1.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자크 루이 다비드는 1748년 파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9살이 되던 시기에 아버지는 결투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다비드는 건축가였던 외숙부들 사이에서 자라게 되고 다비드가 자라면서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그를 다비드의 외가 쪽 친척인 프랑수아 부셰에게 보냅니다. 프랑스아 부셰는 로코코 양식으로 작업하는 유명한 화가이자 소묘가, 판화가입니다. 당시 50대였던 부셰는 자신이 직접 가리키기에는 늙었다고 생각하여 다비드를 직접 제자로 삼지 않고 조셉 마리 비앙을 다비드의 스승으로 선택합니다. 이후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그림을 배웠으나 로마상에서 여러 번 탈락하게 되고 좌절합니다. 하지만 비앙의 설득에 다시 도전하여 결국 로마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다비드는 1780년까지 약 5년간 이탈리아에서 니콜라 푸생, 카라치 등 17세기 거장 작품을 연구하는데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의 화풍은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에서 신고전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니콜라 푸생은 프랑스의 화가로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주의적인 주제를 많이 그렸던 화가이며 안니발레 카라치는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시 화가입니다. 루이 16세에게 의뢰를 받아 작업한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다비드의 대표작입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다비드는 급진파였던 자코뱅에 가입하여 혁명에 깊게 관여합니다. 1793년에는 혁명가 마라의 죽음을 그린 <마라의 죽음>을 작업합니다. 1794년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협력하여 혁명 정부였던 국민공회의 의장까지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함에 따라 다비드도 투옥됩니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옹호자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지만 다비드는 이때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2.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그는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로 일하게 됩니다. 유명한 작품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작품도 이때 탄생합니다. 말에 탄 나폴레옹의 영웅상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때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사나운 말 위에 올라탄 평온한 자기 모습을 그릴 것을 명했으며 다비드는 웅장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1804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로 임명이 됩니다. 세로 6.1미터, 가로 9.3미터의 대작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은 1806년부터 1807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1815년 나폴레옹 퇴위 후,  다비드는 1816년에 벨기에의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망명 후에도 왕정으로부터 프랑스로 귀국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9년 후인 1825년에 브뤼셀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3. 신고전주의 양식

신고전주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서구 전체에 풍미했던 예술 양식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 미술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시대에는 엄격한 선과 면이 강조되었으며, 영웅, 신화 속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 화풍이 특징입니다. 이 전에는 바로크, 로코코 미술이 성행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왕과 교회의 요구에 따라 화려하고 역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로코코 미술은 새롭게 부흥한 신흥 귀족과 부르주아에 따라 멋과 기교, 장식을 중시하며 화려한 색채로 자유롭고 발랄한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로코코 미술이 귀족 계급과 사교계를 중심으로 번성하면서 점점 관능적이고 퇴폐 형상까지 보이자 신고전주의 작가들은 반기를 듭니다. 바로 고전의 형식과 위엄을 강조하는 정통 예술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질서정연한 통일감, 명확한 표현, 형식, 내용의 균형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이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등의 화가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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