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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아나 폰타나>

1. 르네상스 여성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

르네상스 시대의 여성 화가는 매우 적었습니다. 여성들의 활동이 제약되어 있었으며 남편의 지원 없이는 예술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여성 화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라비니아 폰타나입니다. 여성 화가에게 금기였던 '누드화'를 처음 그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1552년 라비니아 폰타나는 프로스페로 폰타나와 안토니아 디보날디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자 교사였습니다. 그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훌륭한 화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교육을 합니다. 1576년, 그녀의 초기 작품인 종교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는 그녀의 섬세한 표현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초상화, 종교화, 역사화 등을 그리며 명성을 쌓아갔으며 많은 의뢰를 받게 됩니다. 특히 명망 있는 가문 여성들의 의뢰가 많았습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1577년 이몰라 출신의 화가 조반니 파울로 차피와 결혼합니다. 결혼 후에는 대부분의 여성이 직업 활동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재능을 보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줍니다. 부부에게는 11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라비니아 폰타나보다 오래 산 자녀는 3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580년대에는 귀부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들의 관계는 매우 좋았습니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일부 여성들은 라비니아 폰타나 아이의 부모 역할을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여성 누드화를 포함한 초상화 이외에도 종교화, 신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성당 제단화의 의뢰받기도 했으며 이후 왕, 귀족, 교황에게도 많은 의뢰를 받게 됩니다. 1603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초청으로 로마로 이사를 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지원을 받으며 실력으로 당당히 인정받게 됩니다. 그녀는 로마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교황 바오로 5세의 초상화도 그리며 성공한 여성 화가가 됩니다. 

 

2.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여성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의 작품에는 섬세한 표현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비니아 폰타나의 초기 의뢰자들은 부유한 귀족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들이 입은 패션의 화려함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금박 스티치, 레이스 장식, 구슬 장식까지 고급 장신구들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냈습니다. 귀족 여성들의 초상화에는 강아지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르네상스에서 개는 충실함을 상징합니다. 강아지와 여성을 같이 초상화에 표현하면서 여성의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초상화를 그리던 그녀는 제단화도 성공적으로 그려냅니다. 이 시대에는 여성 화가가 교회의 제단 위에 공개적으로 걸리는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추기경은 1584년 라비니아 폰타나에게 제단화 제작을 의뢰하였고 라비니아 폰타나는 제단화를 제작한 최초의 여성이 됩니다. 이후, 그녀는 신화를 기반으로 한 여성 이미지를 작업하기도 했는데 그때 여성 화가가 그린 최초의 여성 누드화 'Minerva Dressing'이 탄생하게 됩니다.  

 

3. 안토니에타의 초상

<곤잘보스의 딸 안토니에타의 초상>

그림 속 소녀의 아버지는 페트루스 곤잘부스로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섬에서 '암브라스 증후군'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귀족들의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궁정을 오가며 자랐습니다. 유럽의 궁정에서는 난쟁이, 털이 난 사람들이 인기였습니다. 곤잘부스는 프랑스의 왕 앙리 2세의 궁정에서 미술과 음악을 배웠습니다. 이후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그들 모두 동일한 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초상화 속 인물은 그의 자녀 중 한 명인 안토니에타 곤잘부스의 초상화입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이 소녀를 마르그레테의 궁정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그 소녀를 우아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문서에는 "야만인 돈 피에트로는 카나리에 제도에서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 보내졌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귀족처럼 살았지만 그들의 선물로 이용되었던 그녀의 운명이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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