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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1. 일그러진 진주, 바로크 시대

'바로크' 라는 말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페롤라 바로카(péola barroc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종종 너무 지나쳐서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바로크는 16세기 말,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에서 종교 미술의 형태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95개조 반박 성명서를 내고 반종교개혁 운동을 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확산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손상된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미술의 힘을 빌어왔습니다. 그들은 화려하고 극적인 종교화들이 필요했고 이것이 17세기 로마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바로크 미술의 시작었습니다. 스페인은 중앙집권적 절대왕정 국가였기 때문에 종교 미술에서 궁정 미술로 변모하며 궁정 초상화들이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중 유명한 궁정 화가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입니다. 스페인에서 활약한 궁정 화가이며 유럽의 회화 역사상 최고의 초상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입니다. 바로크 미술은 사실주의, 풍부하고 강렬한 색채, 음영과 질감의 대비 효과, 역동성, 과격한 운동감, 극적인 효과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2. 스페인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벨라스케스. 그의 그림 재능을 살리기 위해 그의 부모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 견습을 보냅니다. 미술 연구가이기도 한 파체코는 교양 높은 이론가이기도 했습니다. 11세부터 18세까지 파체코의 아래에서 견습 과정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흡수한 그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파체코의 딸 파나와 결혼한 벨라스케스는 24세가 되던 해,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국왕에 의해 그는 궁정 화가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예술에 많은 투자를 하던 펠리페 4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을 방문한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와 교류했으며, 30~40대에는 이탈리아 방문을 하면서 경력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 체류할 때 그렸던 로마 교황의 초상화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궁정 화가뿐만 아니라 왕궁 직원의 직책도 주어졌는데 화가의 지위가 전혀 높지 않았던 시대에 화가인 벨라스케스가 작위의 칭호를 얻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왕궁의 중직도 담당하게 된 벨라스케스는 과로로 인해 작위를 받자마자 61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궁정 화가로서 왕궁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으며 베라스케스를 괴롭히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를 화가로서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3. 벨리스케스의 작품 포인트 

-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많은 초상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펠리페 4세와 왕족 관계자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의 초상화도 그렸습니다. 지위가 높은 인물일수록 초상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위엄, 아름다움을 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과장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흰옷의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

 

-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았던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와 왕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아내 사이에 태어난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는 공주의 성장 과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펠리페 4세는 1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10살을 넘길 수 있었던 자녀는 오직 3명이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고귀했던 공주를 펠리페 4세는 '내 기쁨'이라고 편지에 적을 만큼 매우 귀여워했습니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자기 사촌인 레오폴드 1세와 약혼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레오폴트 1세는 예쁘다고 소문이 난 그 공주를 너무 보고 싶어 했고 초상화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에 유명한 초상화 화가인 벨라스케스를 떠올렸고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공주를 그려 빈로 보냈습니다. 3살, 5살, 8살의 공주가 그림 속에 담겨 있습니다. 벨라스케스에게도 마르가리타 공주는 매우 애틋한 존재였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녀를 찾아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이던 매부리코와 주걱턱이 공주에게도 나타났고 벨라스케스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공주의 옆모습을 담거나 한쪽으로 치우쳐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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